7번째 헌혈.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이랑 종종 헌혈의 집에 갔는데 정작 성인이 된 후로 성공한 기억이 없었다. 희미한 기억으론 두어 번 정도 헌혈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는 점차 가지 않게 되었다.

지난 1월에 조혈모세포 기증신청을 하고 문득 헌혈도 다시 해볼까 싶었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당시 유리병에 담긴 액체에 혈액을 떨어뜨리고 헌혈 불가 판정을 받았던 게 생각났다. 철분제를 바로 구매했다. 꾸준히 먹어보고 다시 시도해보자.

스마트폰 시대에 맞게 헌혈 관련 어플이 있다고 해서 설치를 하고 보니 과거 기록도 나온다. 너무 오래되어서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마지막 헌혈 기록은 2000년 5월 9일이었다. 2020년의 5월 9일은 근무가 없는 토요일이다. 그래서 정확히 20년만에 다시 헌혈을 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헌혈의 집을 예약했다.

느즈막하게 일어나서, 아니 사실 휴일엔 오후에 일어나는 경우도 많지만, 닦으려고 보니 흰 머리카락이 보인다. 뽑으려고 거울을 보며 이러지러 머리카락을 넘기는데 그보다 앞쪽에 더 보인다. 하나, 둘. 한번에 세 개의 흰 머리카락을 보니 뽑아서 뭐하나 싶다. 어차피 앞으로 계속 생길 텐데.

게으름을 부리다 보니 시간이 촉박해져서 가는 길에 토스트 하나를 사먹는다. 막상 헌혈의 집에 들어가니 새롭기도 하고 이런 건 달라졌구나 싶은 것도 있었다. Latte is horse. 음료 디스펜서가 있었는데 코로나19 여파인지 정수기만 있고 헌혈 후 음료를 제공한다고 되어 있었다. 간식을 직접 챙기는 것이 아니라 헌혈 후 따로 챙겨 주는 것도 달라졌구나. 어플로 전자문진을 해두었기에 혈압만 측정하고 (최고혈압이 130 넘고 심박수가 91로 나와서 알게 모르게 흥분했었나 싶기도 하다) 간단하게 구두 문답을 하고 채혈을 했다. 옛날과 다르게 기기에 넣어서 검사가 이루어졌다. 좋은 세상이다.

철분제 덕분인지 집으로 돌아가라는 통보는 받지 않았다. 잠시 대기 후에 호명되어 본격적인 헌혈을 위해 간호사가 양팔을 살폈다. 왼쪽 팔을 보고, 오른쪽 팔을 보고, 왼쪽 팔에 지혈대를 채우고 다시 보고, 오른쪽 팔에 지혈대를 채우고 다시 본다.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지혈대를 하나 더 가지고 와서 왼쪽 팔에 지혈대를 두 개 채우고 보고 팔을 쓰다듬으면서 본다. 다시 오른쪽 팔에 지혈대 두 개를 채우고 역시 쓰다듬는다. 문득 내 팔뚝이 혈관 찾기 어려웠던 게 생각난다. 간호사가 선임으로 보이는 다른 간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흔히 말하는 ‘짬’의 차이인지 왼쪽에 한번 오른쪽에 한번 지혈대를 채우곤 왼쪽에서 채혈 하겠다고 한다. 역시. 내 기억에도 오른쪽 팔로는 혈관에 바늘을 꽂은 적이 없었다. 헌혈 의자에 올라 앉으니 과거 경험을 물으며 헌혈 했을 때 피가 잘 나왔냐고 한다. 혈관 찾기는 어려워도 피는 잘 나왔다. 헌혈 자체는 금방 했었다고 말하니 간호사가 능숙한 솜씨로 한번에 바늘을 꽂는다. 역시 선임은 다르다. 아무래도 간호사의 최고 스킬은 한번에 혈관 찾아 바늘 꽂는 것이 아닐까? 의료진들 사이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주사 바늘 안 아픈 간호사가 제일이지.

바늘을 꼽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문득 놀란다. 피부에 닿은 관이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피부 안에 숨어 있어 알 수 없었던 내 피가 주는 그 뜨거움이 생경했다. 예전에도 이랬나? 다행히도 살아오면서 참혹한 일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글로만 접하던 “뜨거운 피”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피가 지나는 관에만 살짝 닿아도 이렇듯 뜨거운데 실제 몸에서 나오는 피는 오죽할까. 다음에 그런 표현을 또 읽는다면 이 뜨끈한 온도를 기억하겠지.

채혈이 시작되고 몇 년 째 완독을 못해서 다시 읽기 시작한 “빼앗긴 자들” 초반을 읽어나갔다. 두어 페이지 읽었나 싶은데 기계가 울린다. 아직 옆에서 PDA에 정보를 입력하던 간호사가 허탈해하며 웃는다. “찾기는 힘든데 금방 끝나네요. 찍기도 전에 …” 20년만에 헌혈이라 그런지 320ml만 채혈해서 그렇다 … 고 하기엔 예전에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 같이 헌혈하던 친구들 중에는 매일 아침 아령 운동을 해서 그런지 더 금방 끝나던 친구도 있었다. 남들은 지루할 만큼 긴 시간 하던 걸 순식간에 하고 간식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뭐, 아직 혈관들은 건강한 가보다.

아침에 어플로 봤을 때는 혈액양이 3일 정도로 부족하다고 나오던데 방문한 헌혈의 집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인천에 헌혈의 집이 총 세 곳 있는 걸로 봐선 기관 수나 접근성의 문제를 개선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전자문진 후 나오는 설문조사를 하다 보니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지 접근성에 대한 항목을 두긴 했었다. 나는 접근성과 기관에 대한 신뢰 개선이 필요하다고 체크했다. 사실 적십자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안 좋다. 나부터 도시가스나 수도요금 고지서처럼 뿌려지는 적십자 회비 청구서는 보면 찢어버리니… 헌혈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나쁘지 않아서 독려 되는 편인데 오히려 기관 때문에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인원을 놓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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